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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대 떡볶이" 김상현 대표는 옛 추억과 향수를 담은 떡볶이 프랜차이즈를 론칭했다.
거골이 우뚝 선 눈매, 날렵하게 빠진 콧날, 강인한 인상은 예사 인물이 아닌 포스를 풍겼다.

신사동 가로수길에 1호점을 론칭한지 1년반 만에 60호점까지 문을 연 떡볶이 프랜차이즈 ‘국대 떡볶이’ 김상현 대표(32)다.

사업의 시작은 학비를 반환해 구입한 중고 트럭으로 장사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김 대표는 그의 아버지가 교수로 재직 중인 대학교에 유도 전공자로 입학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도 아버지처럼 체육대학 교수가 되길 원했다.

김 대표는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했고, 전역하자마자 캐나다 유학길에 올랐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는 아버지의 생각을 공감할 수 없었다.

“나는 교수가 되기 위해 10년 동안 공부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학생 시절 50명 중 25등 안에도 못 들었거든요.”

김 대표는 부모님이 지불한 학비를 3개월이 되기 전 부모님 몰래 환불받았다.

평소 사업에 꿈이 있었던 김 대표는 그길로 중고 트럭을 한 대 사 캐나다를 돌며 군고구마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당시 군고구마를 사먹는 캐나다인은 없었다.

그는 곧 트럭장사를 접고 온라인으로 신발을 판매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 신발을 싸게 떼다 온라인에 올려 판매를 시도했지만 재고만 쌓여갔다. 얼마 안 돼 신발 장사도 접었다.

김 대표는 토론토 시내 바와 펍에 주류를 배달하는 사업 아이템을 찾았고, 석달 만에 월매출 700만원을 기록했다.

그는 주류뿐 아니라 한인 음식점 배달업 ‘온더고(on the go)’를 오픈해 한인 음식점 리스트와 메뉴를 정리해 홍보했다.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캐나다 정부는 김 대표에게 영주권을 내주겠다고 제안했다.

김 대표는 영주권을 마다하고 2006년 귀국길에 올랐다. 또 다른 사업 아이템이 떠올라서였다.

“부모님은 제가 한국에 들어온 건 꿈에도 모르셨어요. 열심히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줄로만 아셨지요.”

그는 캐나다에서 유명 브랜드의 흰색 티셔츠를 한보따리 구매해 한국에 들여와 의류 사업에 손을 댔다. 기본 흰 티셔츠에 70여가지 프린트를 종류별로 넣어 고급스럽게 제작했다.

그가 제작한 티셔츠는 인기를 끌었고, 백화점과 구매대행 쇼핑몰 등 상위 6개 온라인 업체로부터 입점 러브콜을 받았다.

“거기까지였어요. 3년 동안 서서히 망해갔죠. 제작비만 수억원이 들었어요. 모아놨던 4억원을 다 쓰고 직원 월급을 줄 자금이 없어 대부업체에서 1억원을 대출받았습니다. 망한 이유요? 그림은 큰데 제 그릇이 너무 작았죠.”

김 대표는 사업에 대한 열정은 큰데 그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경험이 없었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돌아보니 내 자신의 부족함이 보였다. 과거에 망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국대 떡볶이"의 전직원은 20대 훈남들이다. 이들은 고객에 대한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했다.

“어서오세요”

국대 떡볶이 매장에 들어서면 20대 꽃미남 직원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한다. 미소천사 청년들은 탄탄한 근육질 팔뚝으로 떡볶이를 휘젓는다. 여중, 여고생은 물론 여대생들의 마음은 설렌다.

인테리어는 학창시절 향수를 자극하는 복고풍이다. 학교 책걸상을 가져다 테이블로 사용한다. 떡볶이는 학교 앞에서 먹던 밀가루 떡을 사용해 추억의 맛을 재현했다.

“어릴적부터 떡볶이를 좋아했어요. 어느 동네를 가든 시장에 꼭 들러 떡볶이 맛을 봤죠. 지금의 국대 떡볶이는 4년 전 처음 맛보고 접목했습니다.”

김 대표는 몇 번의 사업을 통해 실패를 경험하고 친구와 함께 전국 여행을 떠났다. 그러던 중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떡볶이를 만나게 됐다.

그는 “이거다 싶었죠. 맛있는 떡볶이를 넘어 향수를 자극하는 떡볶이를 콘셉트로 사업을 기획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비즈니스학도 공부하고 창업설명회를 찾아다니며 연구했습니다.”

김 대표는 28세 겨울, 이화여자대학교 앞에서 노점으로 떡볶이 장사를 시작했다. 국가대표의 줄임말 ‘국대’의 출발이었다. 그는 국대에 꿈을 담았다.

“수많은 여대생들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떡볶이 장사를 한다는 것이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명물이 되자’라는 각오로 여러 가지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맵게도, 달게도 해보고, 야채를 종류별로 바꿔가며 넣어 보았죠. 손님들의 반응을 통해 맛을 찾아 갔어요. 지금은 까다로운 입맛의 고객들이 더 좋아하죠.”

그는 스스로를 ‘떡볶이 장인’이라 여겼다. 아무리 손님이 북적여도 그가 원하는 맛이 나오지 않으면 곧바로 장사를 접고 문을 닫았다. 몇날 며칠동안 지방을 돌며 독특하고 맛있다는 떡볶이 가게를 찾아다녔다. 자연스레 상권 보는 눈이 길러졌다.

하지만 하루 매출은 15만원 밖에 나오지 않았고, 대부업체에서는 빚 독촉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김 대표가 당시 가장 부러운 사람은 ‘빚 없는 사람’이었다.

김 대표는 “‘시크릿’을 믿었다. 가진 자금은 없었지만 원하는 점포 앞에 가서 매일 ‘난 꼭 저기서 사업을 하겠어’라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김상현 대표는 7전8기 정신으로 실패를 통해 사업의 지혜를 얻었다.

그는 이대 앞 노점에서 장사하며 사업계획서를 다듬어갔다. 그리고 2009년 김 대표는 사업 과정을 다 봐왔던 친구 2명에게 투자를 제안했다. 수익금의 80%는 넘기되 프랜차이즈 본사는 김 대표가 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친구들은 김 대표의 떡볶이 맛도 보지 않고 바로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몇 번의 사업 실패 과정에서 은행의 신용은 잃었지만, 친구들의 신뢰는 얻었죠.”

신사동 가로수길에 오픈한 국대 떡볶이 1호점은 오픈하자마자 대박이 났다. 월매출 1천만원을 돌파했고, 입소문을 통해 2호점, 3호점 문의가 들어왔다. 곧 월매출 5천만원을 기록했다.

“20평이 안 되는 매장에 하루 종일 손님이 꽉 찼어요. 정신없이 움직이다보니 놓치는 것들이 많았어요. 장인정신이 발휘됐죠. 새벽 2시까지 운영했었는데 저녁 7시에 과감히 문을 닫았어요.”

김 대표는 바쁘다고 손님에게 소홀히 하는 것은 안 된다고 판단했다. 손님에게 물을 셀프로 가져다 먹으라고 하는 것도 국대 떡볶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꽃미남 직원 3명과 함께 손님 접대 시뮬레이션을 연습했다. 손님이 매장에 들어서면 무조건 우렁차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기로 정하고 톤과 음량까지 맞춰 연습했다.

서비스 정신을 브랜딩화 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국대 떡볶이는 어느 지점을 가든 활기가 넘친다.


 
"국대 떡볶이" 전 매장은 훈남 청년들의 미소와 에너지로 활기차고 밝은 분위기를 뿜는다.

김 대표는 사업계획서에 적어놨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 접목시켰다. 삼고초려를 거쳐 인력을 데려 오기도 했다. 그는 “매일이 처음 겪는 일인 듯 신기하다. 사업은 할수록, 알수록 더 어려운 것 같다. 정체되지 않고 공부해야 살아남는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그는 “맛있으면 손님들이 알아서 찾아온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며 “매장의 입지가 중요하다. 상권분석이 필수다”고 강조했다.

“같은 시스템과 같은 맛을 가진 매장이라도 위치에 따라 매출액이 달라져요. 고객들이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자리에 점포를 오픈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죠. 횡단보도 앞이나 사거리 등 유동인구가 많은 곳을 선점하는 것이 좋습니다. 상권이 좋은 곳에 오픈하면 자본금이 많이 들지만, 자본금이 적게 든다고 리스크가 적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매경닷컴 김윤경 기자 / 사진 팽현준 기자>
출처: http://dbplus.mk.co.kr/index.php?TM=WZV&MM=VM&year=2011&no=590707&NCA=8&RC=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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