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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  -Speciality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 -
SPA는 미국 브랜드 ‘갭’이 1986년에 선보인 사업모델로 의류기획∙디자인, 생산∙제조, 유통∙판매까지 전 과정을 제조회사가 맡는 의류 전문점을 말한다. 백화점 등의 고비용 유통을 피해 대형 직영매장을 운영, 비용을 절감시킴으로써 싼 가격에 제품을 공급하고, 동시에 소비자의 요구를 정확하고 빠르게 캐치하여 상품에 반영시키는 새로운 유통업체이다. 고객수요와 시장상황에 따라 1~2주 만에 ‘다품종 대량공급’도 가능한 것이 특징이며, SPA를 ‘패스트패션’이라고도 부른다.





 


요즈음 상권에 나가보면 메인상권에 100평 이상되는 공간이 생기기만 하면 이러한 해외 SPA브랜드들이
많이 생겨난 것을 볼수 있습니다.
2010년 통계를 보면 의류 판매점중 평당 매출액 1위~10위권의 매장은
저러한 글로벌 SPA 브랜드와 아웃도어 브랜드 매장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의류판매점쪽은 워낙 유행에 민감하고 소비자들의 패턴이 다양하게 바뀌어
의류쪽 전문가가 아닌 저로서는 다소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네요~

다 제가 모자란 탓이겠죠^^;

하지만 확실한건 먹거리, 입을거리를 다루는 창업 아이템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할 것이라는 거죠~
어쨋든 이러한 글로벌 SPA 브랜드에 대해 알고 길거리를 다녀보시면 뭔가 더 새로운게 보이는 재미가 있으실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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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저녁 서울 명동의 `국대떡볶이`. 떡볶이와 튀김을 판매하는 분식집이지만 분위기는 얼핏 카페를 연상시킨다. 1980년대 학창시절을 연상시키는 학교 책걸상에 아기자기한 소품이 복고 분위기를 물씬 자아낸다. 손님들이 매장 안으로 들어설 때면 20대 훈남 직원들이 큰 소리로 일제히 인사를 건넨다.

분식집이 고급화되고 있다. 카페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인테리어와 깔끔한 분위기, 정량화된 조리법 등을 내세워 떡볶이집 등 분식집이 새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죠스떡볶이 등 업계가 추산한 올해 떡볶이시장 규모는 약 1조6000억원 선. 특히 떡볶이 전문점은 고객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여성층을 겨냥해 `훈남 마케팅`과 여성 메뉴 개발, 클럽파티 등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박남수 한국창업전략연구소 팀장은 "불황기에 강한 업종인 분식전문점이 맛과 인테리어, 서비스 등을 고급화하는 등 기존 분식점의 단점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고 있다"며 "특히 최근 고물가에 분식으로 한 끼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업그레이드한 분식점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고 설명했다.

`죠스떡볶이`는 빨강 녹색 흰색 등 강렬한 색상이 눈길을 사로잡는 독특한 매장을 꾸몄다. 죠스는 여성이 주 고객층이라는 점을 배려해 립스틱이 묻지 않게 한입 크기로 만드는 등 떡볶이 모양부터 신경 썼다. 여성들이 좋아하는 달큼하고 쫄깃한 맛도 살렸다.

`국대떡볶이`는 과거 학창 시절 향수를 자극하는 복고풍 인테리어가 특징이다. 학교 책걸상을 테이블로 쓰고, 전화기와 참고서 등 소품을 가져와 옛날 학교 분위기를 자아낸다. 강남권 등을 중심으로 한 28개 직영점에서는 붉은색 유니폼에 빨간 두건을 쓴 훈남들이 손님들을 맞아 `훈남 마케팅`으로도 유명세를 탔다. 1980~1990년대 학교 앞 떡볶이처럼 밀떡만 판매하는 것이 특징.

떡볶이 브랜드화의 원조 격인 `아딸`은 위생 수준과 손맛 계량화, 상권조사 등의 체계를 갖춰 업계에 도입한 곳이다. 특히 테이크아웃 전문점 개념으로 상권에 접근한 것이 시장에 제대로 먹혔다. 길목 좋은 곳에 소규모 전문점을 차리자 주요 고객층이 학생에서 가족으로 바뀌었다. 아딸 관계자는 "가족이 주 고객층으로 바뀌니 테이블 단가도 높아지고, 포장 단가도 2~3배 뛰었다"고 말했다.

신세대 떡볶이 전문점들이 내세우는 가격도 비싸지 않다. 떡볶이 2500원, 튀김 2500원, 순대 3000원 선 등으로 기존 길거리 떡볶이와 유사한 수준이다.

이 같은 분식집은 `해주세요` 등 신개념 심부름센터와 연계해 배달서비스까지 나서며 덩치를 키우고 있다.

`해주세요`는 다양한 생활 심부름과 배달 대행을 해주는 맞춤형 심부름 서비스센터. 선릉역 매운떡볶이, 공수간 등 분식집 등에 배달서비스를 해준다. 손님 입장에서는 메뉴를 주문하면서 거리에 따라 배달 가격만 내면 되기 때문에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붕어빵과 찐빵 등 길거리 음식도 세련된 카페로 들어왔다. 올봄에 첫선을 보인 `쿠로다이`는 일본의 명물 간식 중 하나인 `다이야키(도미빵)`를 판매하는 카페다. 붕어빵과 유사한 도미빵은 즉석에서 구워내는 1㎜의 바삭한 껍질과 풍성한 프리미엄 팥소가 특징. 녹차 호두 검은깨 블루베리 등 5가지 맛을 선보이고 있으며 커피와 생과일 주스 팥빙수 등도 판매한다.

지난해 7월 문을 연 `락쉬미`는 찐빵의 고정관념을 깬 카페다. 고열로 따끈하게 찐 빵을 도넛과 머핀 형태로 내놓는다. 튀기지 않고 찌는 데다 설탕 등이 들어가지 않아 건강에 민감한 주부들이 가족의 영양 간식으로 많이 찾는다. 주로 10평 내외의 아기자기한 소규모 카페 형태다.

<유주연 기자>
 

출처 : http://dbplus.mk.co.kr/index.php?TM=WZV&MM=VM&year=2011&no=620329&NCA=8&RC=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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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대 떡볶이" 김상현 대표는 옛 추억과 향수를 담은 떡볶이 프랜차이즈를 론칭했다.
거골이 우뚝 선 눈매, 날렵하게 빠진 콧날, 강인한 인상은 예사 인물이 아닌 포스를 풍겼다.

신사동 가로수길에 1호점을 론칭한지 1년반 만에 60호점까지 문을 연 떡볶이 프랜차이즈 ‘국대 떡볶이’ 김상현 대표(32)다.

사업의 시작은 학비를 반환해 구입한 중고 트럭으로 장사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김 대표는 그의 아버지가 교수로 재직 중인 대학교에 유도 전공자로 입학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도 아버지처럼 체육대학 교수가 되길 원했다.

김 대표는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했고, 전역하자마자 캐나다 유학길에 올랐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는 아버지의 생각을 공감할 수 없었다.

“나는 교수가 되기 위해 10년 동안 공부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학생 시절 50명 중 25등 안에도 못 들었거든요.”

김 대표는 부모님이 지불한 학비를 3개월이 되기 전 부모님 몰래 환불받았다.

평소 사업에 꿈이 있었던 김 대표는 그길로 중고 트럭을 한 대 사 캐나다를 돌며 군고구마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당시 군고구마를 사먹는 캐나다인은 없었다.

그는 곧 트럭장사를 접고 온라인으로 신발을 판매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 신발을 싸게 떼다 온라인에 올려 판매를 시도했지만 재고만 쌓여갔다. 얼마 안 돼 신발 장사도 접었다.

김 대표는 토론토 시내 바와 펍에 주류를 배달하는 사업 아이템을 찾았고, 석달 만에 월매출 700만원을 기록했다.

그는 주류뿐 아니라 한인 음식점 배달업 ‘온더고(on the go)’를 오픈해 한인 음식점 리스트와 메뉴를 정리해 홍보했다.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캐나다 정부는 김 대표에게 영주권을 내주겠다고 제안했다.

김 대표는 영주권을 마다하고 2006년 귀국길에 올랐다. 또 다른 사업 아이템이 떠올라서였다.

“부모님은 제가 한국에 들어온 건 꿈에도 모르셨어요. 열심히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줄로만 아셨지요.”

그는 캐나다에서 유명 브랜드의 흰색 티셔츠를 한보따리 구매해 한국에 들여와 의류 사업에 손을 댔다. 기본 흰 티셔츠에 70여가지 프린트를 종류별로 넣어 고급스럽게 제작했다.

그가 제작한 티셔츠는 인기를 끌었고, 백화점과 구매대행 쇼핑몰 등 상위 6개 온라인 업체로부터 입점 러브콜을 받았다.

“거기까지였어요. 3년 동안 서서히 망해갔죠. 제작비만 수억원이 들었어요. 모아놨던 4억원을 다 쓰고 직원 월급을 줄 자금이 없어 대부업체에서 1억원을 대출받았습니다. 망한 이유요? 그림은 큰데 제 그릇이 너무 작았죠.”

김 대표는 사업에 대한 열정은 큰데 그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경험이 없었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돌아보니 내 자신의 부족함이 보였다. 과거에 망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국대 떡볶이"의 전직원은 20대 훈남들이다. 이들은 고객에 대한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했다.

“어서오세요”

국대 떡볶이 매장에 들어서면 20대 꽃미남 직원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한다. 미소천사 청년들은 탄탄한 근육질 팔뚝으로 떡볶이를 휘젓는다. 여중, 여고생은 물론 여대생들의 마음은 설렌다.

인테리어는 학창시절 향수를 자극하는 복고풍이다. 학교 책걸상을 가져다 테이블로 사용한다. 떡볶이는 학교 앞에서 먹던 밀가루 떡을 사용해 추억의 맛을 재현했다.

“어릴적부터 떡볶이를 좋아했어요. 어느 동네를 가든 시장에 꼭 들러 떡볶이 맛을 봤죠. 지금의 국대 떡볶이는 4년 전 처음 맛보고 접목했습니다.”

김 대표는 몇 번의 사업을 통해 실패를 경험하고 친구와 함께 전국 여행을 떠났다. 그러던 중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떡볶이를 만나게 됐다.

그는 “이거다 싶었죠. 맛있는 떡볶이를 넘어 향수를 자극하는 떡볶이를 콘셉트로 사업을 기획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비즈니스학도 공부하고 창업설명회를 찾아다니며 연구했습니다.”

김 대표는 28세 겨울, 이화여자대학교 앞에서 노점으로 떡볶이 장사를 시작했다. 국가대표의 줄임말 ‘국대’의 출발이었다. 그는 국대에 꿈을 담았다.

“수많은 여대생들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떡볶이 장사를 한다는 것이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명물이 되자’라는 각오로 여러 가지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맵게도, 달게도 해보고, 야채를 종류별로 바꿔가며 넣어 보았죠. 손님들의 반응을 통해 맛을 찾아 갔어요. 지금은 까다로운 입맛의 고객들이 더 좋아하죠.”

그는 스스로를 ‘떡볶이 장인’이라 여겼다. 아무리 손님이 북적여도 그가 원하는 맛이 나오지 않으면 곧바로 장사를 접고 문을 닫았다. 몇날 며칠동안 지방을 돌며 독특하고 맛있다는 떡볶이 가게를 찾아다녔다. 자연스레 상권 보는 눈이 길러졌다.

하지만 하루 매출은 15만원 밖에 나오지 않았고, 대부업체에서는 빚 독촉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김 대표가 당시 가장 부러운 사람은 ‘빚 없는 사람’이었다.

김 대표는 “‘시크릿’을 믿었다. 가진 자금은 없었지만 원하는 점포 앞에 가서 매일 ‘난 꼭 저기서 사업을 하겠어’라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김상현 대표는 7전8기 정신으로 실패를 통해 사업의 지혜를 얻었다.

그는 이대 앞 노점에서 장사하며 사업계획서를 다듬어갔다. 그리고 2009년 김 대표는 사업 과정을 다 봐왔던 친구 2명에게 투자를 제안했다. 수익금의 80%는 넘기되 프랜차이즈 본사는 김 대표가 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친구들은 김 대표의 떡볶이 맛도 보지 않고 바로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몇 번의 사업 실패 과정에서 은행의 신용은 잃었지만, 친구들의 신뢰는 얻었죠.”

신사동 가로수길에 오픈한 국대 떡볶이 1호점은 오픈하자마자 대박이 났다. 월매출 1천만원을 돌파했고, 입소문을 통해 2호점, 3호점 문의가 들어왔다. 곧 월매출 5천만원을 기록했다.

“20평이 안 되는 매장에 하루 종일 손님이 꽉 찼어요. 정신없이 움직이다보니 놓치는 것들이 많았어요. 장인정신이 발휘됐죠. 새벽 2시까지 운영했었는데 저녁 7시에 과감히 문을 닫았어요.”

김 대표는 바쁘다고 손님에게 소홀히 하는 것은 안 된다고 판단했다. 손님에게 물을 셀프로 가져다 먹으라고 하는 것도 국대 떡볶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꽃미남 직원 3명과 함께 손님 접대 시뮬레이션을 연습했다. 손님이 매장에 들어서면 무조건 우렁차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기로 정하고 톤과 음량까지 맞춰 연습했다.

서비스 정신을 브랜딩화 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국대 떡볶이는 어느 지점을 가든 활기가 넘친다.


 
"국대 떡볶이" 전 매장은 훈남 청년들의 미소와 에너지로 활기차고 밝은 분위기를 뿜는다.

김 대표는 사업계획서에 적어놨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 접목시켰다. 삼고초려를 거쳐 인력을 데려 오기도 했다. 그는 “매일이 처음 겪는 일인 듯 신기하다. 사업은 할수록, 알수록 더 어려운 것 같다. 정체되지 않고 공부해야 살아남는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그는 “맛있으면 손님들이 알아서 찾아온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며 “매장의 입지가 중요하다. 상권분석이 필수다”고 강조했다.

“같은 시스템과 같은 맛을 가진 매장이라도 위치에 따라 매출액이 달라져요. 고객들이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자리에 점포를 오픈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죠. 횡단보도 앞이나 사거리 등 유동인구가 많은 곳을 선점하는 것이 좋습니다. 상권이 좋은 곳에 오픈하면 자본금이 많이 들지만, 자본금이 적게 든다고 리스크가 적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매경닷컴 김윤경 기자 / 사진 팽현준 기자>
출처: http://dbplus.mk.co.kr/index.php?TM=WZV&MM=VM&year=2011&no=590707&NCA=8&RC=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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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증하는 '베이비부머 창업' 明暗

자영업자 올 하반기 40만명↑…기존 가맹점 폐업도 증가세
비용 5억 이상 투자형 증가세…폐업자 흡수 고용정책 필요

자영업 부문 간 명암이 극명하다. 치킨집과 같은 소자본 점포는 저가 경쟁에 시달리는 반면 5억원 이상이 투자되는 커피전문점 등은 성황이다. 15일 점심 무렵 서울 무교동의 한 커피전문점은 손님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자영업시장에도 불황과 함께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영업자 수가 늘어나면 폐업자 수도 덩달아 증가, 사회안전망이 흔들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통계청의 ‘11월 고용동향’ 에 따르면 자영업자 수가 566만명으로 전년 동월보다 13만5000명 늘어났다. 올 하반기에만 40만명 가까이 증가한 것이어서 이런 추세로 가면 자영업시장이 심각한 한계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는 관측이다. 반면 카페 레스토랑 등 5억원 이상 드는 ‘투자형’ 창업시장은 개화기를 맞고 있다.

◆깊어지는 양극화 현상

요즘 창업시장을 주도하는 세대는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들은 개인 독립점보다는 인지도가 높은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선택해 창업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브랜드 지명도가 낮은 중소 가맹본부는 신규 가맹점이 늘어나지 않아 한숨을 내쉬고 있다. 기존 가맹점주들도 신규 진입자들 탓에 매출이 줄어들어 울상이다.

생계형 창업이 주종을 이루는 대표적인 업종은 치킨점. 보통 33㎡(10평) 이하 매장에 1억원 미만의 창업비용으로 종업원 없이 가족종사자만으로 가게를 열 경우 생계형 창업으로 불린다. 100여개의 중소형 치킨 브랜드 가맹본부에 생닭과 훈제 닭을 공급하는 닭 생산·도매업체 대대푸드원 관계자는 “올 하반기 들어 매출이 평균 15% 정도 감소해 하루 매출이 50만원 이하인 영세 가맹점들은 생계에 곤란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창업비용이 5억원 넘게 드는 투자형 창업아이템은 창업 상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중·대형 커피전문점이 대표적인 사례다. 카페베네의 가맹점 수는 720개로 올 들어 300곳 이상 늘었다. 매장면적이 165㎡(50평)를 넘는 이 커피점의 창업비용이 서울지역에선 5억원을 웃돌지만 신규 가맹점 증가세가 이어지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건물 소유자들이 자녀들에게 점포 경영을 맡기려고 계약하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수익이 불투명해지자 건물 소유주들이 투자형 창업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추세라는 설명이다.

◆빈곤층 추락 막을 대책은 없나


 
최근 창업시장에 줄지어 진입하는 50대들은 오랜 직장 경험은 있지만 자영업에는 초보자나 마찬가지다.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얘기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창업 후 폐업률이 1년 내 30%, 2년 내 45%로 상승곡선을 이루다 3년 안에 절반 이상인 55%가 문을 닫는다. 다시 재기하기가 힘든 연령대여서 빈곤층으로 추락할 가능성도 그만큼 크다는 게 심각한 문제다.

폐업하는 시니어 세대들을 흡수할 수 있는 고용정책이 시급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변명식 장안대 프랜차이즈경영학과 교수는 “가맹점의 경영지도 업무를 맡는 슈퍼바이저는 점주의 경험과 지식을 뛰어넘는 전문가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 반대”라고 말했다. 그는 “자영업을 하면서 닦은 노하우를 임금근로자로 변신해 활용할 수 있도록 일정한 요건을 갖춘 폐업자들을 가맹본부의 슈퍼바이저로 활용하는 방안을 정부 차원에서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창동 유통전문기자 cdkang@hankyung.com

 

출처 :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121587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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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동 떡볶이 '원조' 마복림 할머니 별세



신당동 떡볶이 '원조' 마복림 할머니 별세

'신당동 떡볶이'를 처음 만들어낸 인물로 알려진 마복림 할머니가 지난 13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향년 91세.

17일 고인의 유족 등에 따르면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난 마씨는 6ㆍ25 직후인 지난 1953년 신당동 골목에 떡볶이 가판대를 열고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고인이 만든 떡볶이는 고추장에 춘장을 섞은 양념으로 맛을 내 호응을 얻었으며 오늘날 '신당동 떡볶이촌' 일대에서 판매하는 고추장 떡볶이의 시초가 됐다.
고인이 운영하는 떡볶이 가게는 동네 주민 등을 상대로 영업하다가 1960년대부터 입소문을 타고 성업, 1970년대에는 언론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유족은 전했다.
"떡볶이 장맛의 비결은 며느리도 모른다"는 고추장 광고 대사로 1990년대 중반 유명세를 타기도 했고, '원조' 떡볶이 맛을 찾는 손님들로 고인의 가게는 늘 붐볐다.
최근 3년여간 병상 생활을 했던 고인은 숨지기 전 몸이 크게 쇠약해져 유언도 남기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는 양념 제조 비법을 전수받은 며느리들이 '마복림 할머니 떡볶이집'을 상호로 가게를 잇고 있으며 신당동 일대에서 분점도 운영하고 있다.
매일신문 공식트위터 @dgtwt / 온라인 기사 문의 maeil01@msnet.co.kr
 

출처 :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73006&yy=2011

 

 

제가 고등학교다닐때부터 대학2학년까지 저희 부모님께서 신당동에서 호프집을 하셨었는데요..
마복림 할머니네 떡볶이 집에서 몇미터 안떨어져있었더랬죠...

90년대중반 부터 2000년대 초반까진 신당동 상권이 저 분 때문에 상당히 좋았는데요..
요즈음 가보면 예전같지 않더군요..
뭐 서울에서 예전보다 좋아진 상권이 몇개나 있겠냐만은..
왕십리 곱창골목이 재계발로 없어진 후로 신당동쪽으로 곱창집들이 들어서고 있긴 한데요~

아무튼
늘 오며가며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런 기사를 접하니 좀 짠하네요..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좋은곳에서 편히 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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